결투 (2023)
2019.6.30-7.9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원작 윤이형
각색.연출 김진아
출연 배선희 이지혜
조연출.무대감독 이수림
드라마터그 라시내
무대 김재란
조명 정유석
음향 목소
안무 손나예
그래픽 정김소리
사진.영상 장태구
목소리 출연 이리 ㅇㅇㅇ
오퍼 라소영 이슬
PD 강윤지
제작. 지금아카이브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연출 노트
우리는 서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김진아
"우리는 서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작의 이 문장은 노래 「I don't Know You」로 옮겼습니다. 공연을 만들면서도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하고 더듬은 문장인데, 하나의 의미로 정해서 읽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너를 모르기 때문에 사랑한다', '너를 모르기 때문에 두렵다', '너를 알게 되는 것은 끔찍하다', '너를 알게 되는 것은 기쁘다', '네가 나를 알게 되기를 바란다', '네가 나를 영영 모르기를 바란다'...
《결투》의 '나'는, '너'를 영영 알 수 없기에 남은 마음들을 이야기합니다. 너와 나 사이에 벌어진 일에 고통과 기쁨이 구분할 수 없이 섞여있어 모든 것이 미결이라고 말합니다.
2011년 발표된 원작은, 매일 끔찍한 일들을 목도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괴로움에서 쓰였다고 합니다. '그러고도 인간이냐'라는 물음이 자신과 서로를 찌르고, 더 큰 손상을 피하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굳혀야 했던 때라고요. 2019년 초연을 준비하던 시기에도 비슷한 괴로움이 있었습니다. 지목하고 고발 중인 폭력에 조금씩은 연루되어 결백할 수 없는 이들이 자신과 서로에게 때로 얼마나 가혹했는지 기억합니다. 가장 정당한 약자가 되기 위한 분별로 서로를 긋는 짓을 그만하자고 너무나 말하고 싶은 때였습니다.
지금은 그때처럼 괴롭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다,'거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뒤에 무엇을 더 할 수 없음에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마음을 지우고 무관하게 지낼 수 있다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미결의 마음은 계속 돌아오고... 우리를 정말 살게 하는 것들은 그 안에, 두려움과 괴로움과 함께 섞여 있다고, 《결투》는 제게 말해주었습니다.
드라마터그 노트
이야기의 '우리' - 접촉의 윤리
라시내
어쩌면 바로 무지의 순간에, 우리를 형성한 것이 우리 앞에 놓인 것에서 분기할 때, 타자와의 관계에서 기꺼이 훼손당하려는 자발성이 인간이 될 기회를 구성할 때, 바로 그때 윤리는 우리가 위험을 감수하길 요구한다 [...] 다른 사람에 의해 훼손된다는 것은 일차적 필연성, 고뇌일 것이 분명하지만, 어떤 기회, 즉 메시지를 전달받고, 요청을 받고, 나 아닌 것에 속박되고, 또 옮겨지고, 신속히 행동하게 되고, 어딘가에 말을 걸고, 따라서 일종의 소유물로서의 자족적인 “나”를 비울 기회이기도 하다. 바로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하고 설명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무책임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분명 용서받을 것이다. — 주디스 버틀러, 『윤리적 폭력 비판』
몸들은 언제나 감염의 가능성에, 타자의 침투에 노출되어 있다. 몸은 구멍이고, 또는 구멍들이고, 구멍은 타자들이 드나드는 자리다. 우리는 손바닥만한 천 쪼가리로 얼굴에 난 구멍들을 가려 몸에게 타자인 타자들의 침습을 차단한다. 타자는 오물이고, 재난이다. 만지고 싶지 않은 불결한 것이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죽음의 위협이다. 생존의 정언명령은 — 자신을 보호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접촉을 기피할 것 — 모종의 ‘결벽증’을 동반한다.
결벽의 징후는 더러 ‘이해’나 ‘인정’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그런 이들도 있지, 그럴 수도 있지 —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서로가 서로에게 결코 닿지 않는 선에서. 가능한 무감하게, 그리고 무탈하게. 그러나 접촉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다. 서로가 서로를 향할 때 우리는 원치 않는 일들을 겪게 될 것이다. 어쩌면 너는 나에게 적대적이고 심지어 나의 몸에 폭력을 행사할지도 모른다. 만약 너의 품이 다정하고 따뜻하다면 나는 언젠가 영영 너를 잃어버리게 될까봐 두려워질 것이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서로를 상처입히고 슬프게 할 운명이며, 그것이 서로에게 타자인 타자들, ‘우리’의 의미다. 그러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무해한 존재인 한에서만 관계를 맺는다면 그런 것을 관계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극은 다소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극을 진행시키는 것은 인물들 간의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말하기다. ‘나’는 줄곧 누군가를 향해서 이야기를 건네고, 최은효는 ‘나’에게 자기 이야기를 쏟아낸다. ‘나’로부터 누군가에게로 가는 하나의 길과 최은효로부터 ‘나’에게로 오는 또 하나의 길이 있으나, 길들은 서로 다른 시공간에 위치하여 결코 만나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말하기는 독백과는 다르다. 독백이 아무도 듣지 않는 말, 아니 오직 말하는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말이라면 — 그러므로 독백의 주체는 다른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만 관계하는 ‘결벽증적’ 나르시시즘의 주체다 — 이야기는 들려줄 누군가가 있기에 비로소 시작되는 말하기다. 그것은 이미 언제나, 바로 지금, 타자에게 닿고자 하는 몸짓이다.
리뷰
2023.8.17.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심층 리뷰
연극평론가 엄현희
"분열하는 자아는 통제 대상인가 - 지금아카이브 《결투》"
무대는 무미건조하다란 단어가 잘 어울린다. 결투장이 주요 공간이기 때문에 빨간 피가 튀거나 흐를 듯 한, 땀이 배어져 나오거나 눈물과 슬픔 등 감정이 물씬 드러난 곳을 상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연극은 냉랭한 죽음의 표정을 닮은 듯 혹은 죽음 뒤 남은 것은 정적과 고요란 문장이 떠오르듯 어떠한 감정도 담지 않은 무심한 공간에서 펼쳐진다. (...)
SF연극에서 이러한 빈 무대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다니, 치장 없이 단출한 공간이 이질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된 <결투>는 대신에 한 가지 눈에 띄는 공간 배치를 보여준다. 가운데 기다란 사각형 무대를 둔 채 객석을 양면으로 배치한 것. 객석 위치를 사면으로 배치하거나 혹은 무대 전체를 원형으로 감싸는 등 최근 연극 무대는 객석 위치 변화를 통해 극 세계와 만나는 관객 경험을 다양하게 만들려 한다.